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단 편집) === 유년 시절 === [[1879년]] [[3월 14일]] 오전 11시 30분 독일 울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이는데 12~16살에는 [[미적분]]을 혼자서 공부했다고 하며, '''특히 어린 시절에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원론]]을 읽으며 그 논리성에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에는 전혀 천재답지 못한 일화도 있었는데 지적장애는 없었지만 3살 가까이 되어도 쉽게 말을 잘 하지 못 했고, 7살이 되었을 때도 부모님이 시키는 간단한 심부름도 제대로 못 했을 정도로 인지적인 발달은 꽤 늦었던 편에 속했다고 한다.[[https://m.blog.daum.net/ulsanedu/7427895|#]] 그리고, 평소에도 매사에 말수가 적은 편인데다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청소년기에는 [[김나지움]]에 진학했는데 [[수학]], [[물리학]]에 심취하여 당시 교육과정을 뛰어넘어 [[교사]]들도 쩔쩔매는 질문을 해 유명한 학생이 된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초월질문에 교사들은 "너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대꾸했는데, 이게 와전되어 아인슈타인이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는 식으로 떠돌게 된 것이란 얘기도 있다. 이는 교사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 당시 정립되어있던 이론을 일개학생이 반박해봤자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을테니까. 또한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는건 [[토머스 에디슨]]에게 적용되던 레퍼토리였다. 당시 독일의 [[주입식 교육]][* 현재 독일은 과거의 이런 주입식 교육이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여 전쟁이 끝난 후 대대적인 교육 개편을 진행한다.]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훗날 학풍이 보다 자유로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튼 1894년 말에는 의사에게 진단서[* 신경쇠약증으로 알려졌다고 한다.]를 받아서 자퇴를 하고 가족을 찾아 떠나는데, 이 시기에 쓴 첫 번째 논문이 'On the Investigation of the State of the Aether in a Magnetic Field'(자기장에서의 에테르의 상태)이다. 참고로 이때가 한국 기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근데 18~19세기만 해도 천재들이 이런 경우는 많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나이에 '어느 젊은이의 직업선택에 대한 고찰'이라는 '''고등학교''' 졸업 논문을 썼다. 내용은 직업선택이 개인의 소명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끼치는 도움까지 고찰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대규모 관점의 논문이다. 당시 유럽 고등학생은 사실상 지금 대학생급 사회적 교육지위를 갖던 시대라, 퀄리티 자체야 천재와 평범한 사람들이 차이는 나지만 일단 고등학교 들어간 이상 어른 취급을 하며 논문 정도는 누구나 다 기본으로 써야 했다. 사실 이런 문화가 이어지기 때문에, 유럽의 전체적 분위기는 한국과 달리 지금도 웬만하면 선생님 등 성인들이 고등학생들에게 공식적으로 말할 때 "당신", "해 주세요" 등에 해당하는 성인 대우 존중표현을 쓰는 분위기다. 반대로 [[미국]]에서 고등학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국과 비슷한 고삐리 정도이다. [[유럽]]과 북미의 사회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일례다.] 1895년 중순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입학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남달리 뛰어난 수학 실력과 물리학 실력은 최고점을 받았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지만 어학 성적에서 낙제를 하는 바람에 공과대학 입학 시험에 낙방한 것이다. 그래서 학장이 김나지움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오면 입학시켜주겠다고 해서 배려로 1년 후에 입학하게 되었고 17세 때 스위스 아라우 주립학교에 다녔다. 당시 [[교수]]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교수의 딸이었던 첫사랑인 마리 빈텔러(Marie Winteler)를 만났다.[* 1877년생으로 아인슈타인보다 두 살 연상인데, 이 뒤로도 아인슈타인은 이상할 정도로 연상인 여자들과만 엮였다고 한다. 한편 아인슈타인의 여동생 마야는 그 교수의 아들 폴 빈텔러와 결혼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러브레터|연애편지]]를 자주 썼는데, 1896년 아인슈타인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마리가 [[교사]]가 되고, 이사를 가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둘은 계속 연락을 했지만 아인슈타인이 먼저 연락을 끊고 싶다고 했고, 마리는 그런 아인슈타인을 잔인하다고 비난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남아있는 편지들 중에는 찢어진 것도 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1903년에 밀레바와 결혼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마리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01&aid=0007531643|신문기사]]. 1896년 9월 스위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통과했다. 스위스에서는 졸업 시험을 1~6으로 평가하는데 6이 최고점이다. 아인슈타인은 대수학, 기하학, 물리학에서 6을 받았다. 지리학 등 세 과목에서 4점, [[프랑스어]]에서 3점을 받아서 한국 인터넷에서는 '아인슈타인은 낙제생이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한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다닌 아라우 주립학교가 이전 학기는 등급제로 수학, 물리학을 등급제로 표기하여 1로 적었으나 다음 학기부터 점수제로 표기하여 6을 적어 생긴 오해이다. 당시 독일이 등급제였기 때문에 그의 성적을 본 이들이 그가 [[물리학자|이론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낙제점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낙제한 것은 대입 시험 시의 수학과 물리학 외의 지리, 프랑스어 등의 과목에서와 대학시절 '장 페르네의 기초 물리학 실험' 수업에 자주 출석을 하지 않아 화난 교수가 1점을 부여하여 그 수업에 낙제한 것이 전부였다. 물론, 별로 흥미가 없었던 어학 관련 과목은 실제로 성적이 나빴고, 어쨌든 낙제를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하기는 했다]]. 현대 한국의 상황으로 굳이 비유하자면, 수학과 과탐은 1등급이 나오는데, 언어와 영어는 5~6등급대에서 노는 극단적인 이과 덕후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잘하던 수학마저도 흥미가 떨어지고 게을리해서 캠퍼스 커플이었던 밀레바의 수학 노트를 빌려보면서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그래도 밀레바가 도움을 준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수업을 자주 빼먹고도 무사히 졸업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아인슈타인에게 노트를 빌려 준 밀레바는 수학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졸업에 실패했다. 이 해에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국적을 포기해 무국적자가 되었는데, 학창시절 내내 겪었던 독일의 강압적인 군국주의에 대한 반발심으로 군대를 싫어했기에 독일 제국의 병역을 거부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위인전에도 그가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군대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는 내용이 등장하며, 이는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는 근거로 인용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